숲의 끝에 있는 것은 차가운 수정 동굴이었다. 침입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롭게 벼려진 종유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그 모습은 알폰스의 유약한 마음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 공포스러운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알폰스는 앞서 걸어가는 남자의 뒤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는 든든했다. 자신보다 조금 작은, 아마 턱 아래에 닿을 그 앙증맞은 체구와는 달랐다. 그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알폰스는 마치 자신이 피식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알폰스의 의식을 깨웠다. 볼에 떨어진 그 작은 액체를 알폰스는 손가락으로 훑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새어드는 찬란한 빛이 그들이 나아갈 곳임을 나타내는 이정표처럼 보였다. 짙고 두터운 녹빛 ..
나른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 그 아래에서 타오르는 눈동자 또한 금빛이었다. 알폰스는 넋을 잃고 제 눈앞에 선 이를 올려다보았다. 꼴사납게 엎어졌다는 사실도, 예의 없게 입을 헤 벌리고 있다는 것도 알폰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지더니 그의 하얀 발이 알폰스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걷어차인다! 그렇게 생각하며 알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딸랑.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강렬한 충격과 함께 알폰스의 모자가 휙 날아가더니 텅, 텅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모자만을 정확히 차낸 남자는 다시 발을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알폰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훅 들여다보았다. 아까 전의 거리가 훨씬 나았다. 알폰스는 거의 기절할 것처럼 벌벌 떨었다. 지극히 ..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건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증이지만, 에드워드 엘릭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수업을 들을 때나 밥을 먹을 때, 심지어는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까지도 에드워드는 줄곧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올해로 3학년, 이제 성적에도 적당히 신경을 써야 졸업 전에 어떤 학점을 지울지 선택하기 편한 때. 과 수석을 도맡아 하는 에드워드와는 1학년 때부터 절친이자 이번 학기 룸메이트이기도 한 린 야오는 에드워드의 스마트폰 온리 라이프에 깊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맨날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해?" 린은 물었다. 학식이었고, 사람은 바글바글했다. 이 좁디좁은 학생 식당에서는 빨리 먹고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당연한 미덕이거늘. 오른손에는 숟가락을, 왼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 열심히 입으..
"에드워드 씨, 이리 와요." 여유롭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빨대를 쭉쭉 빨아들이던 에드워드는 선글라스를 추어올렸다. 작열하는 눈부신 태양 아래, 하나의 레몬처럼 상큼한 것이 자신을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귀여운 것. 야자수 그늘에 튜브를 깔고 누워 다리를 꼬고 있던 에드워드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에드워드는 올여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하와이에 불쑥 꽂혀버렸다. 하와이, 하와이! 이유도 없이 연신 하와이를 연호하던 에드워드는 2주 전, 아예 여행 잡지를 한가득 안고 귀가했다. 눈부시고 화려한 남국의 정경을 담은 책자를 알폰스의 눈앞에 들이밀며, 에드워드는 모든 예약을 자신이 도맡을 테니 넌 몸만 오라고 당당하게 큰소리를 쳤다. 요즘에는 보기 드문 에드워드의 강렬한 러브콜도 그렇거니와, 연..
신이여, 이 아름다운 풍경은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나이다. '알겠니? 알폰스. 저 너른 바다 건너에는 신들이 살아 숨 쉬는 황금의 도시가 있단다.' 몸이 약했던 어린 시절, 알폰스의 조모 이레네는 언제나 알폰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를테면 깊은 화산 속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 혹은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인어의 이야기를. 알폰스의 부모는 항상 허황된 이야기 그만 좀 하시라며 조모를 닦달했지만 알폰스도 이레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모님의 이야기는 마치 꿈결 같아요. 알폰스가 속삭이면 이레네는 그의 어린 이마에 사랑이 듬뿍 담긴 키스를 해주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알폰스를 꿈꾸게 했다. 좀처럼 밖으로 나돌지 못한 알폰스에게 이레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간접적인 체험이자 그의 가치관을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