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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렌

[알에드] 신의 도시

정래인 2018. 8. 23. 18:48




  신이여, 이 아름다운 풍경은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나이다.






  '알겠니? 알폰스. 저 너른 바다 건너에는 신들이 살아 숨 쉬는 황금의 도시가 있단다.'


  몸이 약했던 어린 시절, 알폰스의 조모 이레네는 언제나 알폰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를테면 깊은 화산 속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 혹은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인어의 이야기를. 알폰스의 부모는 항상 허황된 이야기 그만 좀 하시라며 조모를 닦달했지만 알폰스도 이레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모님의 이야기는 마치 꿈결 같아요. 알폰스가 속삭이면 이레네는 그의 어린 이마에 사랑이 듬뿍 담긴 키스를 해주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알폰스를 꿈꾸게 했다.


  좀처럼 밖으로 나돌지 못한 알폰스에게 이레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간접적인 체험이자 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아주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는데, 중에서도 특히 알폰스를 푹 빠지게 만든 건 '황금 도시 이야기'였다. 이레네의 무릎에 앉아 들었던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는 늘 알폰스 하이드리히의 작은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했다. 그럴 때면 이레네 알폰스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 동그란 눈을 들여다보았다. 너의 그 두 눈은 언젠가 너를 바다로 이끌게 될 거야. 조모의 속삭임을 들으며 알폰스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1492년, 서인도 항로를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마침내 인도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급격히 타오르기 시작한 신세계로의 열망은 빠르게 유럽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인류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알폰스 하이드리히가 학위를 무사히 따낸 1500년대의 시작, 수많은 콘키스타도르가 거대한 함선을 타고 바다를 가로질렀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 황금향을 찾는 것이었다.


  황금향. 그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물론 콘키스타도르의 목적은 황금을 빼앗고, 토지를 정복하여 수많은 노예를 부려 부와 명예를 손에 거머쥐는 데에 있었으나, 순진한 알폰스 하이드리히는 그저 그 아름다운 황금의 도시를 눈에 담고 싶었을 뿐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키스타도르의 화려한 언변과 아름답게 꾸며진 입발린 말에 속아넘어간 알폰스는 어느 에스파냐 함선에 기꺼이 몸을 실었다. 부모님의 염려도, 이레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폰스를 막지 못했다. 알폰스는 황금향을, 엘도라도를 꿈꾸었다.


  "...으윽, 컥....쿨럭, 쿨럭........."


  그러나 거기에 있는 건 틀림없이 현실이다. 알폰스는 코와 입으로 질질 새어 나오는 바닷물을 꾸역꾸역 게워내며 모래사장 위로 엎어졌다. 소금기로 따가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알폰스는 함선에서 추락했다. 자신의 모든 짐이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꽉 껴안은 채 바다에 거꾸로 처박힌 알폰스는 그대로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달빛을 머금은 바닷물은 심장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 알폰스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괜히 바다로 나왔다.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이레네의 이야기로만 만족해야 했다. 수없이 많은 후회 끝에 알폰스는 어둡고 컴컴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그의 몸뚱이는 어느 낯선 바닷가로 밀려와 있었다. 


  에스파냐의 햇빛은 뜨거웠다. 그러나 적도의 태양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지옥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태양이 피부를 전부 찢어내는 듯했다. 옷 아래에서 버석거리는 뜨거운 모래는 몸을 뒤챌 때마다 예민해진 살갗을 도려내는 것처럼 따가웠다. 목이 바싹 말랐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소금기에 절여진 피부가 당기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숨을 쉬기가 힘들다는 점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어릴 적 앓았던 천식이 재발한 것일까. 바닷물을 많이 마셨더니 폐렴에라도 걸린 것일까. 의학에 관하여서는 정말이지 문외한인 알폰스는 헛된 추리를 하며 끙끙 앓았다.

  

  이런 텅 빈 곳에는, 아무도 없는 장소에는 자신이 살았다는 증거를 남길 수가 없다. 알폰스 하이드리히는 저만치 밀어낸 채 내버려두었던 절망감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적어도 신에게 기도라도. 알폰스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 천국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그렇다면 그 존재라도 믿어 사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알폰스는 모래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모래 위로 짓이겨지는 손바닥은 마치 불에 지지는 듯 고통스러웠고, 후들후들 떨리는 팔다리는 제 것이 아닌 듯했다. 신에게 기도를. 이레네가 선물한 십자 목걸이를 더듬더듬 손에 쥐고 엎드리려는 알폰스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은 그대로 알폰스는 멈추었다.


  "................이건......."


  그것은 커다란 바위였다. 바위? 아니, 차라리 조각이었다. 인간의 수십 배는 되는 듯한 그 장엄한 바위에는 햇살과 바람, 파도로서는 절대로 조각해낼 수 없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사방으로 뻗은 다리와 하나뿐인 기묘한 눈. 그것은 거대한 털 뭉치처럼 보이기도 했고 가시를 잔뜩 두른 미생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문양의 크리처를 알폰스는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한참 가만히 바위를 바라보던 알폰스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가방, 가방. 알폰스는 중얼거리며 자신의 곁에서 나뒹구는 가방을 급하게 주워 올렸다. 표류하면서도 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던 소중한 가방. 그 안에서 알폰스는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레네에게서 받은 지도. 물에 흠뻑 젖고 사방이 너덜너덜하게 닳은 그 지도는 이미 세상을 떠난 조부의 금고 속, 알폰스에게만 살짝 남겨진 비밀스러운 유산이었다. 그 지도를 알폰스는 내려다보았다. 바위에 새겨진 크리처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이미지가 지도 속에 그려져 있었다.




  유산이 다 뭐냐. 그 자리에서 물고기나 낚을걸. 알폰스 하이드리히는 후회했다. 벌써 꼬박 하루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다리가 벌벌 떨렸다. 학자면 뭘 하나, 바닥에 널린 식물 나부랭이가 뭔지도 모른다. 알폰스는 발아래 간간이 보이는 버섯을 진심으로 뜯어 먹고 싶었다. 색이 화려한 버섯은 독버섯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겨우 참고 있을 뿐, 조금만 더 굶주렸다가는 독이고 뭐고 아예 아까 봤던 큰 바위까지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모님, 저 죽나 봐요.........."


  약한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오늘로 정확히 47번째 내뱉는 탄식이었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은 수많은 덩굴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신비로운 나무는 알폰스를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게끔 했다. 이제는 들어왔던 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알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짙푸른 나뭇잎이 뜨거운 태양을 막아준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눈앞에 사람이라도 하나 딱 나타난다면.........."


  32번째 되풀이하는 소리를 다시금 읊조리던 알폰스는 멍한 눈으로 숲 저편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무언가 알폰스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서 일렁였다. 눈부신 햇살 같기도, 작은 웅덩이 같기도 한 그것은 천천히 알폰스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알폰스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방을 안은 채 두어 걸음 물러나 자신을 향해 접근하는 그것을 살폈다.


  그것은 고양이었다. 아니, 사자였다. 사자? 사자요? 알폰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주 작은, 주먹만 한 크기의 황금사자였다. 사자가 있다는 건 인도란 것일까? 알폰스는 눈을 비비고 다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사자였다.


  황금 사자는 샛노란 눈을 들어 알폰스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알폰스를 멀리하듯이, 혹은 이끄는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리 분별이 가지 않아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알폰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사자의 뒤를 쫓았다.


  사자는 굉장히 빨랐다. 사실은 고양이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작고 날랬다. 사자라고는 서커스단에서 묘기를 하는 모습밖에 본 적이 없으니, 사실 사자인지 아닌지 구별해 낼 재간도 없었다. 그러나 알폰스는 그것이 사자라고 믿고 싶었다. 지식은 믿음에서 온다. 상대가 실존함을 믿고 탐구할 때에야 지식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법이다. 지금처럼. 알폰스는 사자가 완전히 달아나기 전에 그것이 사자인지 알아야 했다. 그것은 학자가 지녀야 할 자부심이었고, 환상향을 동경하던 어린 날의 미련이기도 했다.


  "...헉, 허억......흑................." 


  그러나 체력이 저질이었다. 알폰스는 참회의 눈물을 뚝뚝 흘렸다. 땀도 흘렸다. 집으로 돌아가면 꼭 운동을 하리라 마음먹으며 알폰스는 움직이려 하지 않는 다리를 더 빨리 재촉했다. 그와 동시에 사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망함이 알폰스의 심장을 세게 후려쳤다. 알폰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꼴사납게 볼을 적신 눈물을 알폰스는 덜덜 떨리는 팔로 꾹꾹 눌러 닦아냈다.


  딸랑.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알폰스는 얼굴을 닦던 팔을 내렸다.


  딸랑.


  맑고 투명한 그 방울 소리를 들으며 알폰스는 조금 전 놓쳐버린 사자를 떠올렸다.


  딸랑.


  알폰스는 숨을 죽였다. 생물이 움직이는 듯한 기척이 나무 저편에서 느껴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알폰스는 맨손으로 흙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을 기었다. 물 냄새가 났다. 우거진 덤불 사이로 알폰스는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샘이 거기에 있었다. 바닥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연못이 거기에 있었다. 알폰스가 놓쳤던 황금사자가 덤불 아래로 이어지는 바윗길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사자는 연못 가까이 다가가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품에 답싹 안겨들었다. 알폰스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딸랑.


  사람이 서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찬란한 금발은 마치 황금을 녹인 듯 눈이 부셨다. 투명한 피부를 감싸는 하얀 천은 잔뜩 젖어 살갗이 비쳐 보였다. 가느다란 허리를 감싼 붉은 천과 물 아래로 잠긴 다리가 알폰스의 시선을 통째로 앗아가 버렸다. 호흡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는 알폰스를 향해 그 사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훔쳐보고 있단 걸 들킨 걸까, 알폰스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꼴사납게 주저앉은 알폰스를 향해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딸랑, 딸랑.


  그가 걸을 때마다 방울 소리가 났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알폰스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람의 발목에 방울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야릇하게 느껴졌다. 허리를 동여맨 붉은 천 아래로 뻗은 긴 다리에는 흠뻑 젖은 하얀 옷감이 달라붙어 그 선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끝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물기를 쭉 짜낸 그 사람은, 알폰스 하이드리히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알폰스를 내려다보았다.


  나른하면서도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 그 아래에서 타오르는 눈동자 또한 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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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뉴님이 트윗하신 엘도라도 소재를 차용해보았습니다!

크아악 엘도라도 보세요 대명작 애니메이션 갓곡 갓애니


알이 안 나오고 하이드리히가 주인공인데 알에드라니....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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