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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렌

[알에드] 신의 도시 #2

정래인 2018. 8. 26. 18:56




  나른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 그 아래에서 타오르는 눈동자 또한 금빛이었다. 알폰스는 넋을 잃고 제 눈앞에 선 이를 올려다보았다. 꼴사납게 엎어졌다는 사실도, 예의 없게 입을 헤 벌리고 있다는 것도 알폰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지더니 그의 하얀 발이 알폰스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걷어차인다! 그렇게 생각하며 알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딸랑.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강렬한 충격과 함께 알폰스의 모자가 휙 날아가더니 텅, 텅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모자만을 정확히 차낸 남자는 다시 발을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알폰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훅 들여다보았다.


  아까 전의 거리가 훨씬 나았다. 알폰스는 거의 기절할 것처럼 벌벌 떨었다.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는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수면처럼 찰랑거리며 빛났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도, 붉게 핏기가 도는 입술도 모두 알폰스의 이성을 엉망으로 어지럽혔다. 허리를 숙여 훤히 드러난 옷 안쪽의 탄탄한 살결에 눈이 절로 이끌리는 듯했다. 알폰스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애써 시선을 저만치로 돌렸다. 그러자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팍 찡그린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알폰스를 무섭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Kiu vi estas? Alphonse? hûn kê ne? ਤੂੰ ਕੌਣ ਹੈ! Miks sa siia tulid! (당신 누구야? 알폰스? 당신 누구냐고. 왜 여기에 왔어?)"

  "예?"

  "шта ти радиш овде? Et dixi: Quid facitis!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뭘 하는 거냐고 묻잖아!)"


  알폰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생소한 언어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도 그렇거니와, 드디어 아는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죽은 언어라고 놀려서 죄송합니다. 라틴어 전공하시는 브레다 교수님, 잘못했습니다. 그래도 저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알폰스는 반가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조난 당한 이후로 인간과 처음 나눠보는 대화였기 때문이다.


  "Im 'iustus a Tornacense. Et rimor. (전 그저 여행자예요. 탐험가이기도 하고요.)"

  "Est territis ostentat. Quid pulmentum. Terribilis est pronunciation! (끔찍하군. 그걸 발음이라고 하는 거야?)"


  확실히 모국어가 아니니까. 알폰스는 5년 만에 듣는 힐난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라틴어를 안다면 우리나라의 말도 알지 않을까? 알폰스는 은근한 기대감을 품고 남자를 마주 보았다. 정말이지 끔찍하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금빛 눈동자 속에는 정체 모를 호기심이 잔뜩 배어 있었다. 이 사람은 위험하지 않아.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남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썼다. 그리고 약간 망설이는 듯 입을 열었다


  "당신 혹시 게르만인?"

  "지금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부르죠. 알폰스 하이드리히라고 합니다."


  아, 드디어 모국어가 통한다. 알폰스의 표정이 잔뜩 밝아졌다.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알폰스의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델 정도로 뜨거운 체온에 깜짝 놀란 알폰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남자는 쯧 혀를 차더니 똑바로 섰다. 그리고 알폰스의 허벅지를 꾹 발바닥으로 눌렀다. 딸랑. 방울 소리가 울렸다.


  "아!"

  "일어나. 너 때문에 다 조졌으니까."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온 험악한 단어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잠시, 알폰스는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너 때문에 의식 다 조져 먹었으니까 책임지라고. 따라와. 넌 앞으로 내 노예다."

  "????"


  자신은 긍지 높은 신성 로마 제국의 남자로, 자신의 학문적 욕구를 채운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다하기 위해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몸이었다. 노예라니, 어떻게 그런 끔찍한! 알폰스는 몸을 떨었다. 치욕감으로 떠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을 버러지 보듯 내려다보는 지극히 신화적인 존재를 한낱 알폰스 하이드리히로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름다운 입술로 하나하나 뱉어내는 단어가 치명적이었다.


  "한 달이나 금욕했는데 너 때문에 다 망했어. 어쩔 거야, 이 자식아. 어?"


  길게 트인 튜닉, 혹은 치마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가 매끈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눈을 뗄 수 없는 기묘한 그 차림새가 알폰스의 학구열을 자극했다. 분명 다른 자극도 있었지만 알폰스는 애써 그것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게다가 이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는 그 욕구를 채웠다간 금세 사망의 길로 빠져버릴 게 분명했다.


  "따라 오라고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남자의 긴 머리카락이 알폰스의 눈앞에서 반짝거리며 흩어졌다. 딸랑. 이제는 귀에 익은 방울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알폰스는 바닥을 기듯이 몸을 일으켜 주변에 흩어진 모자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윤기 나는 금발을 따라 알폰스의 시선도 흔들렸다. 알폰스는 그제야 남자를 관찰할 수 있었다. 마치 옛 그리스의 튜닉과 비슷한 복장을 한 남자의 손목에는 금으로 된 팔찌가 걸려 있었다. 발목을 동여맨 붉은 실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방울 또한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안이 살짝 비쳐 보이는 눈처럼 하얀 옷감은 한 번도 물에 닿은 적이 없는 것처럼 뽀송뽀송했다. 하얗게 드러난 어깨가 유난히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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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2외국어가 없는 몸입니다

구글 번역기 최고에요 짝짝짝 틀렸을 가능성 매우 높음


보고 싶은 장면 위주로 쓸 것입니다 히히 알은 다음편에..

도뉴님 최고 사랑 엘도라도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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