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가렌

[알에드] 기다림

정래인 2018. 9. 1. 20:21




  끼이익! 버스가 눈앞에서 소란스럽게 멈췄다. 에드워드는 귀를 틀어막은 채 버스를 노려보았다. 요란하게 증기를 내뿜으며 열린 버스 뒷문에서는 허리가 굽은 노인 한 사람과 교복을 입은 중학생 한 명이 내렸다. 내릴 사람이 다 내린 버스는 멈췄을 때만큼이나 야단스러운 소음과 함께 출발했다. 떠나가는 버스가 남긴 매연이 정류장에 홀로 남은 에드워드의 숨결을 잔뜩 더럽혔다. 켁. 에드워드는 인상을 썼다. 


  오늘 에드워드는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상대는 물론 가장 사랑하는 동생 알폰스 엘릭이었다. 센트럴 대학 앞에 있는 카페에서 가볍게 차 한 잔 한 다음 저녁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건만, 알폰스는 연락도 없이 절찬리에 늦는 중이었다. 에드워드는 카페에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밥집으로 곧장 가는 편이었으므로 미련 없이 카페를 떠나 버스 정류장까지 알폰스를 데리러 나갔다. 후회가 막심했다. 에드워드는 정류장 유리 부스에 기댔다. 그리고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짓을 했다. 커피가 아니라 매연만 실컷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 혼자 사는 에드워드 엘릭에게 화낼 권리는 없었다. 




[알에드] 기다림

주제 : 연락, 카페, 버스정류장




  크세르크세스 칼리지의 우등생이자 에드워드 엘릭의 온리 러브 알폰스는 올여름, 사랑하는 형 에드워드를 위해 귀중한 휴가를 아낌없이 센트럴에서 낭비하고 있었다.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에드워드가 계절학기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고속열차로도 사흘은 족히 걸리는 멀고 먼 거리를 항상 눈물과 함께 배회하던 알폰스는 기말고사를 눈앞에 두고 에드워드를 향해 강렬한 선전포고를 날렸다.


  [이번 여름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형이랑 보내고 말 거야!]


  장거리 연애에 슬슬 지쳐가던 에드워드도 내심 알폰스와 함께 보내는 여름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그 불같은 열의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부추기기까지 했다. 알폰스의 기숙사 친구 메이 창의 지도교수이자 은근히 알폰스를 총애하던 팀 마르코 교수가 새로운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마수를 뻗었으나, 알폰스는 꿋꿋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다음 학기 학점보다는 당장 애인과 보낼 뜨거운 여름 휴가 계획이 더 중요한 알폰스는 서슴없이 아메스트리스행 열차 티켓을 끊었다. 


  그러나 알폰스를 좌절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는 센트럴 역까지 알폰스를 마중 나갔다.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고속열차를 타고 온 알폰스를 보며 에드워드는 활짝 웃었다. 알폰스도 꽃이 만개하는 듯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무려 한 학기 만에 이루어진 사랑하는 연인과의 재회를 기념하며 꼭 끌어안은 다음,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했다.

 

  '알, 사실은 나 계절학기 듣게 됐어.'


  사랑하는 동생을 빠르게 단념시킬 의도였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두 과목. 총 한 달 동안.'


  방학은 한 달 반이었다. 체력 하나만큼은 자부하던 에드워드 엘릭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요즘 대학생이었다. 운동도 게을러서 안 하는 대학교 3학년생이 계절학기를 들으면서 연애를 병행할 만큼 강철 체력일 리가 없었다. 학적 빼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알폰스에게 에드워드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다음날 계절학기를 듣기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가벼운 키스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형.'


  결국 어제 에드워드의 방으로 들이닥친 알폰스 에드워드의 침대 위로 엎어져 거나하게 눈물을 흘렸다. 


  '3개월 만에 만났는데 섹스도 못 해보다니 이럴 순 없어!'


  이대로 싱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절망 섞인 푸념과 함께 알폰스는 에드워드의 베개를 잔뜩 적셨다. 트리샤가 찬장에 숨겨둔 크랜베리 소주를 마신 게 아니라면 저렇게 대놓고 섹스를 외칠 리가 없었다. 침대에서야 어떻든 겉으로는 점잖기 그지없는 동생을 마음 깊이 믿고 있던 에드워드는 안쓰러운 눈길로 알폰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짧게 깎은 뒷머리를 슥슥 어루만져 주었다.


  '다음 주면 계절학기 끝나.'


  괴롭히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얄밉다고 누가 그랬던가. 알폰스는 젖은 눈을 들어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붉게 물든 눈가를 한번 핥아주고 싶어 바싹 마른 입술을 핥는 에드워드를 향해, 동생은 화난 미어캣처럼 팔을 마구 휘둘렀다.


  '2주밖에 못 놀잖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데이트하자.'


  동생은 순한 양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사태는 지금에 이른다. 에드워드는 피곤한 눈을 감았다. 한참 전에 보낸 문자를 알폰스는 아직도 확인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올린 에드워드는 다시금 문자를 날렸다.


  [지금 어디야?]


  무슨 일만 생기면 일단 달려들고 보는 에드워드에게 이런 기나긴 기다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왜 연락이 없는 건지, 혹시 엇갈린 건 아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수많은 생각이 에드워드를 괴롭혔다. 알폰스는 다 큰 성인이고 에드워드가 없으면 헤매는 길치도 아니었지만, 한번 시작된 걱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 자식, 오기만 해 봐. 한 대 때려줄 테다. 에드워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뒤통수에 닿는 차가운 유리 감촉이 과열된 머리를 식혔다.


  [나 버스 정류장인데]


  에드워드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 다시 켰다. 약속한 시각에서 겨우 17분 지났을 뿐이다. 에드워드는 다시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 손을 내렸다. 스니커즈 밑창으로 보도블록을 비비며 에드워드는 시선을 내리 깔았다.


  [빨리 와]


  기다리는 건 너무 지겨웠다. 


  새로운 버스가 정류장을 향해 달려왔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들었다. 끼이익, 시끌벅적한 소음과 함께 버스가 멈춰 섰다. 에드워드는 뒤로 구부정하게 기대 있던 허리를 폈다. 요란하게 증기를 내뿜으며 열린 버스 뒷문에서는 잘 차려입은 여성 두 사람이 내렸다. 버스 문이 닫혔다.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에드워드의 얼굴 위로 매연만 내뿜은 버스는 빠른 속도로 정류장을 떠나갔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숙였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쇄골 위로 툭 떨어졌다. 허벅지 위에 올려놨던 백팩을 의자 옆으로 내리며 에드워드는 손을 맞잡았다.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던 에드워드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울퉁불퉁했다. 에드워드는 손톱 옆에 붙은 거스러미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괜히 차가웠다.


  구두 굽이 보도블록 위로 닿았다. 뚜벅. 공기를 울리는 명확한 소리가 에드워드의 귓바퀴를 따라 흘러들었다. 고막을 울리며 정확한 보폭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를 에드워드는 들었다. 모나게 깎인 손톱을 둥글게 갉아내던 손을 멈추고 에드워드는 고개를 들었다. 용광로에 금을 녹인 듯 샛노랗게 반짝거리는 빛이 깊은 유자 색으로 가라앉아 있던 에드워드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부터 환하게 타올랐다.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 위로 힘없이 늘어진 백팩 스트랩을 움켜쥐었다. 군청색 스니커즈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형, 늦어서 미안해!"


  그리고 에드워드는 있는 힘껏 그 품으로 뛰어들었다.




-

손풀기 겸 쓰는 캠퍼스 알에드!

도뉴님께서 주신 주제로 썼습니다~(^ ^)


'하가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에드] 신의 도시 #4  (0) 2018.09.02
[알에드] 백야  (0) 2018.09.01
[알에드] 신의 도시 #3  (0) 2018.08.28
[알에드] 신의 도시 #2  (0) 2018.08.26
[알에드] 장거리 연애  (0) 2018.08.25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