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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렌

[알에드] 신의 도시 #3

정래인 2018. 8. 28. 21:31




  숲의 끝에 있는 것은 차가운 수정 동굴이었다. 침입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롭게 벼려진 종유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그 모습은 알폰스의 유약한 마음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 공포스러운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알폰스는 앞서 걸어가는 남자의 뒤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는 든든했다. 자신보다 조금 작은, 아마 턱 아래에 닿을 그 앙증맞은 체구와는 달랐다. 그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알폰스는 마치 자신이 피식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알폰스의 의식을 깨웠다. 볼에 떨어진 그 작은 액체를 알폰스는 손가락으로 훑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새어드는 찬란한 빛이 그들이 나아갈 곳임을 나타내는 이정표처럼 보였다. 짙고 두터운 녹빛 덩굴로 가려진 그 커다란 이정표는 반짝이는 빛을 받아 마치 연두색으로 보였다. 남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우아하게 덩굴을 걷어냈다. 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눈부신 빛줄기가 알폰스를 압도했다. 알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착했어."


  남자가 말했다. 알폰스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곳은 온통 금빛이었다. 반짝이며 흐르는 시냇가에는 사금이 자갈처럼 굴러다녔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금으로 된 장신구를 달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그 낙원의 풍경을 보며 알폰스는 중얼거렸다.


  "............El Dorado."


  애타게 찾던 황금향이 눈앞에 있었다. 알폰스는 울컥 터져 나오는 울음을 겨우겨우 삼켰다. 조모님, 제가 해냈어요. 당신의 작은 알폰스가 드디어 황금향을 찾아내었어요. 한참을 만나지 못한 조모 이레네를 그리워하며 알폰스는 벅찬 가슴을 안고 세상을 돌아보았다. 아름답게 날갯짓하는 나비의 무리마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러나 가장 눈부시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알폰스의 곁에 서 있었다. 알폰스는 조심스레 제 곁에 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향의 빛에 한껏 감화된 금발이 춤추듯 나부꼈다. 하얀 천에 가려진 몸의 선은 탄탄하고 건강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울리는 야릇한 방울 소리가 묘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걸음걸이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이 가벼웠다. 인간일까? 신일까? 알폰스는 넋을 놓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알폰스의 눈요깃감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홀로 가볍게 걸어 신전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알폰스는 황급히 남자의 뒤를 쫓아갔다. 차닥차닥, 약간 젖은 듯한 발소리를 들으며 알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맨발이었다. 은은한 주황빛이 감도는 뒤꿈치가 황금으로 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까 전 한참을 헤매던 숲속의 험한 길을 떠올리며 알폰스는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다치지 않았을지 걱정하는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알폰스를 빤히 응시했다.


  "네 이름도 알폰스라고 했지."

  "아, 네. 그렇습니다."


  남자는 다시 자신의 앞길을 걷기 시작했다. 석연찮은 듯 혀를 차던 그는 신전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알폰스는 허둥지둥 신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황금으로 된 아름다운 옥좌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갖가지 아름다운 보석이 여기저기 박힌 그 눈부신 옥좌를 향해 남자는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남자가 그 옥좌에 털썩 걸터앉아 몸을 기댔을 때, 그 화려한 조형물은 오로지 남자만을 위한 장식으로서 존재했다. 남자의 아름다움만이 그 섬세한 세공을 흐릿하게 만들 뿐이었다. 알폰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때였다. 신전의 장막이 걷히고 한 인물이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알폰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강한 충격이 그의 뒤통수에 엄습하는 듯했다.


  그 인물은 상반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동물의 피인지, 아니면 붉은 물감인지 모를 것이 간간이 튄 피부는 건강한 색으로 빛났고, 떡 벌어진 어깨와 보기 좋게 달라붙은 근육은 마치 그리스의 신을 빚은 조각상 같았다. 하반신은 역시 하얗고 길게 트인 천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간간이 그 틈새로 튼튼한 다리가 엿보였다. 살아 숨 쉬는 신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눈 또한 황금을 녹여 담은 구슬처럼 뜨겁고 찬란했다. 


  그러나 알폰스 하이드리히를 경악시킨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남자의 이목구비가 자신과 무척 흡사했던 것이다. 도플갱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보는 순간, 알폰스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방울을 달고 있던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는지.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는지.


  이 사람의 이름도 알폰스이리라.


  알폰스Alfons가 넋을 놓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 알폰스Alphonse로 추측되는 미남자는 옥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서더니 나지막하게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긴 남자는 언짢은 듯 인상을 쓰더니 흘끗 알폰스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는 마찬가지로 작게 대꾸하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거구나. 알폰스는 얼굴을 붉혔다. 괜히 몸을 비스듬히 돌려 주변을 구경하는 척 했지만 이국적인 문양도 찬란한 금빛 장식도 알폰스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늘 꿈꾸던 공간에 도달했음에도 그 환상향보다는 눈앞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아름다운 두 사람의 모습에 더 마음이 끌린 것이다.


  결국 알폰스는 다시 두 사람을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찬란한 신과 같은 두 사람이 자신을 거론해가며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어쩐지 쑥스럽고도 기뻤다. 혼자 있을 때에도 눈부시던 남자는 자신의 상대가 나타나자마자 그 아름다움이 더 빛나는 듯했다. 마치 요정처럼, 미소년처럼 긴 황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길고 가늘게 치켜 올라간 눈매로 알폰스를 간간이 살필 때면 목 뒤가 홧홧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반면 신화 속 영웅 혹은 신 그 자체인 듯한 남자, 알폰스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다른 알폰스의 존재를 반기지 않는 듯했다. 미움받는 건 상관없었지만 괜히 서러운 마음이 앞섰다. 긴 머리 남자가 보이는 호의만으로 다행인가. 


  혼자 기쁘고 서럽고 다 하던 알폰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허둥지둥 시선을 돌리는 알폰스를 향해 상반신을 드러낸 남자가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손에 잡힐 듯 명확하게 드러나는 적의를 알폰스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델 듯이 뜨거운 그 날카로운 감정에 압도된 알폰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도망쳤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시 의연하게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남자의 금빛 눈에는 분명하게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알폰스를 향해 남자가 말을 걸었다.


  “당신, 형의 노예라고 들었습니다만.”


  익숙하게 들려오는 모국어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알폰스는 환히 웃음을 보였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알폰스 하이드리히라고 합니다.”

  “............알폰스 엘릭입니다.”


  엘릭? 파라셀수스의 엘릭서와 연관된 것일까? 분위기에 압도되어 제 본분을 잊고 있던 알폰스의 머릿속이 명쾌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알폰스는 지금 꿈의 땅에 와 있는 것이다. 어쨌든 궁금한 건 다 물어봐야 했다. 학자로서의 본분을 다시금 되새기며 알폰스는 고개를 틀어 저만치에 앉은 남자를 향해 질문했다.


  “당신의 이름은?”

  “내가 안 말했던가? 에드워드. 에드라고 불러.”

  “그럼, 에드워드 씨.”


  자신의 곁에 서 있던 알폰스 엘릭의 얼굴이 밝아짐과 동시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명백한 희비 교차를 알폰스는 눈치챘지만, 애써 모른 하기로 했다. 초면에 막 애칭을 불러 대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따분하다는 듯 옥좌에 기대앉아 하얀 발을 까딱거리는 에드워드를 알폰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노예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뭐?”


  발의 까딱임이 멈췄다.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에드워드를 향해 알폰스는 빙긋 미소를 보였다.


  “저는 부족함 없이 풍족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뭐든지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고, 다들 제 비위를 맞춰주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최근 학위를 따느라 건강이 조금 약해졌을 뿐, 고된 일을 해서 지쳐본 적은 없습니다. 저희 집안에서 노예가 하던 일이라고는 허드렛일 정도일까요. 그저 학자일 뿐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에드워드 씨?


  에드워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알폰스를 쳐다보았다. 귓전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헛웃음이 들려왔다. 알폰스는 제 곁에 선 다른 알폰스의 존재를 애써 무시했다. 화려한 신전. 눈부시게 장식된 그 옥좌 위에 걸터앉은 자그마한 신을 알폰스는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럼 내가 시키는 걸 하면 돼.”

  “형, 차라리 청소라도,”

  “공부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던 새끼들이 하는 짓이라곤 뻔해. 걸레질이 뭔지도 모를걸? 그리고 내 노예니까 내 시중을 들어야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던 또 다른 알폰스는 입을 다물었다. 시중. 에드워드 씨의 시중?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폰스를 향해 에드워드는 하얀 발을 내밀었다. 딸랑. 그의 발목에 매어져 있던 방울이 작게 울었다.


  "신겨."


  옥좌 아래에 굴러다니는 칼리가를 향해 에드워드는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 오만함이 알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노예라도 괜찮을지도 몰라. 예민한 생김새와 달리 그의 마음은 자상한 듯하니까. 알폰스는 옥좌 가까이 다가가 칼리가를 주워들었다. 칼리가 바닥에 잔뜩 박힌 징을 보며 알폰스는 머리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여기는 인도가 아니었구나. 알폰스는 생각했다. 로마 시대의 레기온이 신던 군화다. 그렇다면 여긴 적어도 유럽 대륙 안쪽, 혹은 그 너머일지도 모른다. 페르시아의 근처에 있는 도시일까? 그렇다면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폰스는 에드워드의 새하얀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가 발을 들어 올리더니 알폰스의 턱 아래에 힘을 주었다. 알폰스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에드워드의 아름다운 얼굴이 만족감으로 젖어 드는 것을 알폰스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바닥 위로 꽃잎처럼 사뿐히 내려앉는 발의 감촉을 느꼈다. 알폰스는 조심스럽게 뒤꿈치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그리고 칼리가 끈 안쪽으로 에드워드의 발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옅은 주황빛을 머금은 뒤꿈치가 칼리가 안쪽으로 감춰졌다.


  딸랑, 어김없이 방울 소리가 들렸다. 알폰스는 돌아갈 길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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