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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렌

[알에드] 구원 #2

정래인 2018. 9. 6. 21:33




  "형? 형이야?"


  알폰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골목 안쪽을 커다란 눈으로 응시했다. 한 걸음, 달빛 아래로 걸어 나온 에드워드는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탐스럽게 땋아 내린 긴 금발. 서늘한 눈매 속에 자리 잡은 황금색 눈동자에는 달빛이 한 줌 고여 있었다. 깜박이면 그대로 별빛 가루가 되어 흘러 떨어질 듯한 그 눈부신 빛을 알폰스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전신을 돌고 도는 모든 피가 일제히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귀가 아플 정도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알폰스는 에드워드를 향해 손을 뻗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알폰스를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강한 충격이 알폰스의 심장을 차갑게 얼렸다. 에드워드가 알폰스를 거부했다. 여전히 텅 빈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알폰스는 황망한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형, 어째서........"


  에드워드는 웃고 있었다. 가느다란 눈매를 매혹적으로 휘어 웃으며 에드워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다음에 보자."


  붉은 코트가 휘날렸다. 길게 땋은 금발이 반짝거리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에드워드를 보면서도 알폰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알폰스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뒤돌아 골목을 빠져나왔다.


  "형!"


  알폰스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마주했던 것이 꿈이라도 되는 듯, 에드워드는 마치 환상처럼 골목 사이로 사라져 갔다.


  "형, 형! ......형! 혀엉!"


  몇 번이고 소리불러도, 애타게 외쳐도 끝끝내 에드워드는 알폰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알폰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상심한 나머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던 알폰스는 벽에 기대려 몸을 틀었고 때마침 곁을 지나가던 남자의 어깨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대강 하나로 묶은 남자는 쯧, 혀를 차더니 알폰스의 배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대로 벽에 부딪힌 알폰스는 힘없이 담벼락 아래로 쓰러지고 말았다. 로자리오와 성서가 마치 쓰레기처럼 흙바닥을 굴렀다. 


  검은 눈으로 알폰스를 노려보던 남자는 그대로 휙 몸을 돌려 에드워드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멍이 들 정도로 세게 걷어차여 얼얼한 배를 매만지며 알폰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반바지를 입은 남자의 허벅지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비좁은 통로에 바짝 붙어 선 알폰스는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벽에 붙박인 핑거 플레이트에 손가락을 걸어 익숙하게 회전 다이얼을 돌렸다. 드르륵, 땡. 드륵, 땡. 10자리 숫자를 돌린 알폰스는 어깨를 올려 귀 사이에 수화기를 끼고 품 안에서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다. 신호 대기음이 몇 번 들려오더니, 달칵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나야, 로제. 센트럴에 도착하면 연락 달라고 했지?"

  「알! 벌써 도착했구나. 별일 없어?」

  "당연하지. 한두 번 왔던 길도 아닌걸. 로제야말로 별일 없지?"

  「레트 신이 보호해주시는 성소니까. 문제없어.」


  알폰스는 고개를 기울여 수화기를 조금 더 귀에 바짝 붙였다. 하얗게 빈 종이에 몇 번 만년필을 찍어 누르던 알폰스는 동그랗게 몸을 만 채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을 한 마리 그렸다. 원 모양으로 귀엽게 웅크린 뱀의 등 뒤로 앙증맞은 검은 날개 한 쌍을 달아주며 알폰스는 입을 열었다.


  "......로제,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형태는 틀림없이 우로보로스지?"

  「내가 알기로는 그래.」


  싱 국에도, 크레타에도, 드라크마와 고국 아메스트리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문명 크세르크세스에도. '꼬리를 문 뱀' 우로보로스 이야기는 모든 신화 속에 존재한다. 원이라는 단순한 기호는 불멸과 무한한 재생이라는 뜻깊은 상징을 가진다. 지금은 쇠퇴한 지 오래인 연금술이라는 학문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함의 표상인 우로보로스의 원은 무에서 유를, 흙에서 금을 창조해낼 수 있는 완벽한 물질, 이른바 '현자의 돌'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야?」  

  "응, 조금 전에 우로보로스 문신을 새긴 사람이 지나갔거든. 확인 차 물어보려고."

  「별일이네, 알이 나한테 질문을 다 하고.」


  알은 우리 레트교 수도회에서 가장 뛰어난 엑소시스트잖아. 로제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작게 웃었다. 알폰스도 힘없이 따라 웃었다. 날개 달린 뱀 곁에 '우로보로스'라고 작게 휘갈겨 쓴 알폰스는 만년필을 갈피에 끼운 채 수첩을 닫았다.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수화기를 손으로 옮겨 쥐며 알폰스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일 있었어?」

  "응?"

  「목소리가 좀 이상한걸. 살짝 갈라진 것 같기도 하고.」

  "별거 아냐. 기차를 탔을 때 창문을 열어 놓고 잠깐 잠들었어. 금방 괜찮아질 거야."

  「별거 아니긴. 그러다 된통 감기 걸린다? 자기 전에 꿀물 꼭 챙겨 마셔.」

  "나 어린애 아니야, 로제."


  걱정이 담뿍 어린 로제의 음성을 들으며 알폰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알폰스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땡. 전화가 끊어지는 맑은 종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알폰스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숙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손잡이를 비틀어 방문을 열었다. 낡을 대로 낡은 경첩이 기분 나쁜 비명을 질렀다. 끼이이익, 천천히 문이 열렸다. 알폰스는 터덜터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대로 문에 기댄 채 고개를 젖히고, 알폰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


  깊고 깊은 한숨이 알폰스의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알폰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고개를 정면으로 향한 알폰스는 허름한 침대 위로 기어올랐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베개를 움켜쥔 알폰스는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새카만 사제복에 감싸인 어깨가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숨죽인 흐느낌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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