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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렌

[알에드] 구원

정래인 2018. 9. 3. 22:58




  1917년 8월 27일, 센트럴 제17구 골목에서 시체가 한 구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입고 있던 화려한 파티 의상과 근처 쓰레기통에 버려진 지갑을 토대로 추적한 결과, 피해자의 신원은 1916년 11월경 행방불명된 A모 씨로 밝혀졌다. 9개월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의 유품 앞에서 A모 씨의 가족은 오열했다. 실종 당시 A모 씨와 파티에 동행했던 지인 B모 씨는 그 행색이 9개월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점에 놀라움을 표했으며, 그의 주검을 처음으로 목격하여 헌병대에 신고한 굴뚝 청소부 소년은 그의 모습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평온하게 잠든 사람의 얼굴'이었다고 묘사했다. 6월부터 연속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이 의문스러운 죽음의 행렬에 관하여 센트럴 중앙사령부 소속 로이 머스탱 대령은 오늘 낮 기자회견을 열어......





  레트 신의 제단 아래 쪼그려 앉은 청년은 열심히 걸레를 헹궈냈다.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서슴없이 손을 푹 담근 청년은 양동이 안에서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는 걸레를 움켜쥐고 있는 힘껏 비틀었다. 촤아악! 쥐어짠 걸레에서 솟아난 물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양동이를 두들겼다. 하얗고 매끈한 팔뚝 위로 핏줄이 불거지도록 세차게 걸레를 짜낸 청년은 허리를 폈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태양 빛이 제단을 닦는 청년의 금발을 황홀하게 비추었다.


  “알, 오늘도 고생이 많구나.”


  등 뒤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 알폰스 엘릭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로제 씨.”


  신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태양신의 아들이 아닐까 소문이 자자한, 검은 사제복을 걸친 훤칠한 미남을 로제는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알폰스는 걸레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폰스 가까이 다가간 로제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여기에 온 지도 벌써 7년이 넘었구나.”


  세월이 참 빨라. 로제가 중얼거렸다. 알폰스는 로제의 손을 잡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올해는 찾을 수 있을까?"

  “물론이지. 레트 신의 가호가 항상 너와 함께 하기를.”


  늘 들어온 그 축복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알폰스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알폰스 엘릭은 동부 내란에 휘말려 부모를 잃었다. 무참히 살해된 부모의 시체 앞에서 벌벌 떨고 있던 알폰스를 구원해준 것은 함께 살아남은 친형, 에드워드 엘릭이었다. 에드워드는 언제나 동생을 우선시했다. 알폰스에게 음식을 양보하느라 에드워드는 언제나 굶기 일쑤였다. 알폰스를 지키던 와중 심하게 상처를 입은 다리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썩기 시작했지만, 에드워드는 알폰스를 놓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부모를 잃은 어린 형제에게 뻗어오는 동정의 손길은 없고, 결국 군화 아래 잔혹하게 유린당한 동부의 수많은 고아원을 전전하던 형제는 북새통 속에서 서로를 잃고 말았다. 형을 잃어버린 채 울고 있던 열 살 알폰스를 발견한 것이 바로 로제였다.


  레트 교는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종교로, 악마의 존재를 부정하고 소멸시키는 이른바 '엑소시즘'에 특화된 거대한 종교 집단이기도 했다.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을 저주한다는 허황된 말을 믿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이슈발 내란 이후로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레트 교는 순식간에 국교로 인정받을 만큼 성장했다. 연인을 잃고 레트 교에 빠져든 로제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이 불쌍하고 가여운 고아 소년에게 나눠주고 싶었으므로 알폰스에게 레트 교의 교리를 가르쳐주었다. 형을 잃은 알폰스 역시 레트 교에 심취했다. 빠르게 교리를 흡수하며 자라나는 알폰스를 코넬로 교주는 주의 깊게 응시했다. 알폰스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고위 사제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알폰스의 슬픈 과거사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던 로제는 금세 얼굴을 굳히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보다 들었니? 이번에 일어난 사망 사건 말이야."


  알폰스의 유순한 눈매 아래 감춰진 눈빛이 단박에 날카로워졌다.


  "응. 아무런 외상 없이 죽은 시체 말이지?"

  "죽은 사람에게 외상이 없다니......악마의 소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니?"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로제를 바라보며 알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바, 알폰스는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는 중이었다. 군부 출신 의학박사 팀 마르코는 심장마비라는 소견을 냈다. 그러나 실종된 지 9개월 만에 나타난 시체의 옷이 실종 전과 같이 깨끗할 수 있겠는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면 더더욱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지금까지 발견된 시체의 공통점은 모두 깨끗한 몸가짐에 평온한 얼굴, 사인은 심장마비였지."

  "맞아. 알, 이번 사건은 네가 맡기로 했었지?"

  "응. 교주님이 특별히 부탁하셨어. 군부는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도 말씀하셨고."


  알폰스는 모아쥔 양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의식을 거행했다. 악마를 쫓아내고 귀신을 무찔렀다. 레트 신의 찬란한 이름 아래 망령된 것 모두를 정화하는 것이 알폰스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슴이 술렁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알폰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알."

  "로제,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알폰스의 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로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알폰스를 살폈다. 잘생긴 얼굴이 고뇌로 일그러지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가족처럼 아끼고 돌봐온 청년이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집요하게 추적하던 에드워드의 행적을 결국 놓쳤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레트 신이여, 평화와 안식을."


  알폰스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가슴을 통째로 도려낸 듯 선뜩한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늦여름의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달빛만이 고요히 비치는 밤은 악마의 시간이다. 조사를 위해 리올에서 기차를 타고 센트럴 제17구로 바삐 향한 알폰스는 후미진 골목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체가 거둬진 현장은 음침하고 더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망자의 냄새를 맡고 몰려든 삿된 존재를 감지한 알폰스는 눈을 감았다. 기도는 통하지 않는다. 신앙은 습관이고, 믿음은 일상이다. 태양신 레트는 그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뿐이다. 왼손에 성서를 든 알폰스는 로자리오를 휘감은 오른손으로 시체가 있던 바닥을 짚었다. 은제 로자리오가 서서히 빛나며 어두운 골목길을 환하게 비추었다.


  "신이여, 영광을."


  꺄아악. 일그러진 형상으로 사라져가는 검은 그림자를 알폰스는 한심하다는 듯 응시했다. 그리고 성서를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을 기꺼워하는 악마의 잔여물만이 남아 있을 뿐, 어느 구석에도 단서는 없었다. 알폰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알폰스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거기 너, 시체를 보려고 온 거야?"


  알폰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목소리는. 당혹감으로 덜덜 떨리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알폰스는 고정된 것을 강제로 돌리는 듯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내뱉은 알폰스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안타깝게도 이미 그는 떠난 지 오래야."


  달빛을 받아 파르라니 빛나는 둥글고 하얀 볼. 갑자기 휘몰아치는 여름 폭풍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금발. 피처럼 붉은 코트. 환상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꿈을 꾸는 것일까. 알폰스는 뿌옇게 물들기 시작한 눈을 주먹으로 비볐다. 축축하게 묻어나는 눈물을 사제복에 황급히 문질러 닦으며 알폰스는 이를 악물었다.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금빛 눈동자 한 쌍이 요요하게 휘어졌다.


  "안녕, 알."


  그토록 애타게 찾던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

이런 거 함 써보고 싶었어요 저질렀습니다!

다음편 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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