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이면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늦여름 열기의 잔향. 그 빈 자리를 채우는 허전한 공기는 너무나도 차갑고, 쓸쓸하다. 츠카사는 코트의 목 깃을 세우고 승용차에 올라탔다. 한낮이 다가오면 여름이 다시 한 걸음 불쑥 나아오지만, 가을 새벽은 곧 겨울이었다. 츠카사는 4시간 후에 다가올 여름을 생각하며 몸을 움츠렸다. 옆구리와 팔뚝에 한기가 번진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츠카사는 나즉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습관 같은 가벼운 한숨이 호흡을 대신하게 된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날이 좋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길에 올라 승용차 뒷자석에 몸을 기대고 있는 지금 순간에도 츠카사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창 밖으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가 유독 눈길을 잡아끌었다. 사실 이상하지도 않았다. 가을이 되면 츠카사는 유독 설레곤 했다. 여름 내 푸르던 잎사귀가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정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낙엽을 보며 무엇을 떠올리는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가을이 오면 스오우 츠카사는 츠키나가 레오를 생각한다.
[츠카레오] 비상연락망
책갈피에 낙엽을 끼워두곤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전공책 사이에 겹겹이 쌓여 있던 어여쁜 나뭇잎. 최근 책장을 뒤지다 발견한 수첩에도 낙엽은 있었다. Adorable한 취미였군요. 나뭇잎을 손가락으로 집어올려 살피던 츠카사는 작게 웃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썹은 한껏 처져 있었다. 낙엽이 끼워져 있던 자리에는 숫자와 문자의 나열이 몇 줄 정도 적혀 있었다.
[ Knights 비상연락망 ]
* 급할 때만 사용할 것
답례제를 앞두고, 츠카사는 끈덕지게 선배들을 붙들고 늘어졌다. 이대로는 정말로 끝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웅다웅하던 생활도, 나이츠 활동으로 생긴 선배들과의 유대감도. 그리고 레오와의 인연도, 전부. 휴대폰 번호와 메일 주소. 살고 있는 집과 당장 연락하고 지내는 가족들의 정보까지 싹싹 끌어모았다. 스~쨩, 끈질긴 남자는 사랑받지 못한다구~? 히죽히죽 웃는 리츠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 그렇네요. 리츠 선배는 분명 이사라 선배가 가족이라고 했죠?'
'으응. 그러니까 마~군의 메일 주소로......그래도 마~군은 나만의 것이니까 말야?'
'아름다운 사랑이네, 정말이지 부럽다니까~'
나루카미 아라시의 연락망에는 가족 뿐만 아니라 육상부 전원, 그리고 Valkyrie의 카게히라 미카(그리고 이츠키 슈)의 연락처까지 적혀 있었다. 세나 이즈미는 드물게도 싱글벙글 웃으며 망설임 없이 유우키 마코토의 이름을 적었다.
'봐봐, 카사 군. 유우 군은 나의 정말 사랑하는 남동생이니까~. 최근에는 먼저 말을 걸어줄 정도라고? 아아, 유우 군...'
겨울 내내 그의 손에 애처롭게 들려 있던 아이 러브 유우 군 목도리는 언제부턴가 어딘가로 사라져 있다. 정말로 '유우 군'이 그 목도리를 받아줬을 리가......시덥잖은 고민에 잠겨 있던 츠카사는 본래 목적, 그러니까 레오를 돌아보았다. 슥슥 시원하게 적어내려가던 레오도 가족관계 란에서는 한참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쓰더니 무척 엄격한 표정으로 츠카사를 을러댔다.
'사적으로 루카땅에게 연락하기만 해봐!'
츠카사는 눈을 떴다. 그 때의 레오의 표정은 지금 생각해보면 민망함과 애정으로 뒤범벅 되어 있었다. 그렇게나 여동생을 아끼는, 다정한 사람. 그러나 그는 졸업 후 한 번도 츠카사를 찾지 않았다. 홀연히 사라져 버린 늦여름처럼, 레오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때때로 성큼 다가드는 추억만이 저려올 뿐.
레오를 떠올릴 때마다, 이 마음은 가을빛으로 물들어간다.
그 빛깔은 너무도 아름답고, 외로워서.
당신의 색을 품은 가을은 올해도 츠카사를 찾아왔는데, 정작 곁에는 당신이 없군요. 츠카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처음 만났던 순간,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나란히 선 무대 위의 광경은 어땠는지. 자신을 위해 지어준 악보는 어떤 형태였고, 어떤 음률을 담고 있었는지.
츠카사는 메모 귀퉁이를 꽉 움켜쥐었다. 다시금 뜨인 아름다운 보랏빛 눈은 짙은 결의를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