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또 츠카사는 막 쪼이었고, 레오는 도망쳤다. 고양이 꼬리처럼 나풀거리는 꽁지머리 하며 날랜 몸놀림이 인상적이었고, 그걸 지켜보는 츠카사는 속이 다 쓰렸다. 그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손꼽아 세다 못해 직접 찾아나서기까지 했건만, 결과는 이 모양 이 꼴. 츠카사가 원했던 건 자신을 인정해주고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존경할 만한 Leader였다. 등교도 뒷전, 나이츠도 뒷전에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는 한량같은 존재가 Knights의 유일무이한 왕이리라고는 누가 감히 상상했으랴.
"뭡니까, 정말로......저 사람은."
기대했던 만큼 실망은 크고, 바랐던 만큼 타격도 큰 법. 파릇파릇한 풀숲 사이로 사라지는 레오의 주황색 머리카락을 츠카사는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런 쓰라리고 애틋한 마음을 세간에서는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는 법이다.
[츠카레오] Make some noise
꿈이 너무 궤변이었다. 눈을 뜨고서도 츠카사는 꿈의 여운에서 한참 벗어나지 못했다. 학창시절의 연인은 사랑스러웠다. 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자신을 기억해내지도 못했던 츠카나가 레오. 많이 따랐던 만큼 원망도 많이 했다. 다 좋아서 그랬지, 열렬했구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던 츠카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지금도 열렬하다면 제법 열렬했다. 그 증거로 자신의 곁에 얌전히 누워 있는 연인은 한참 단잠에 빠져 있지 않은가.
음. 방금 말했다시피 꿈의 여운이 잠이 덜 깬 츠카사를 뒤덮고 있었다. 꿈속에서 애태우던 그를 다시 마주하니 흐뭇함도 잠시, 달게 자는 그 평온한 얼굴이 사랑스럽다 못해 얄미웠다. 츠카사는 손을 뻗어 그 뽀오얀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므으으......스오, 아침 인사는 키스로 부탁해......"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던 연인은 크게 하품을 한다. 그리곤 눈물을 글썽이며 졸린 눈을 깜박였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츠카사가 손을 놓자, 레오는 다시금 가물가물 꿈속으로 빠져든다. 레오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은 후, 츠카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침대가 작게 요동쳤다.
"Good morning. 조금 더 자도록 해요, 레오."
"으응......"
레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츠카사는 흐트러진 바스로브를 여몄다. 하얀 슬리퍼를 꿰차 신고서, 느긋하게 거실로 걸어나온다.
츠카사와 레오가 같이 생활한 지도 어언 10년이 흘렀다. 꿈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츠카사에게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시간이다. 고등학교 1학년의 시점으로 보는 미래는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져, 함께 잠들고 함께 눈 뜨는 생활. 삶은 현실이라고 하지만 꿈에 잠긴 채로는 마냥 꿈인 것을. 세수라도 할까,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현재의 스오우 츠카사가 중얼거린다. 과거의 자신에게 현재를 빼앗기는 것도 즐겁지만은 않은 법이다.
비척비척 세면대 앞에 선 츠카사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꿈속의 자신은 지금보다 더 어렸고, 단순했다. 레오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을 가졌다. 세상의 중심이 레오라는 점에서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때는 더 저돌적이었고 직접적이었다.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레오가 부담을 느낀 적도 부지기수였다.
'내 노래, 듣기 싫지 않아?'
불현듯 레오의 목소리가 츠카사의 귓가에 스친다. 아주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레오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츠카사는 그런 레오에게 동경도 실망도 기대도 모두 가지고 있던, 그야말로 복잡한 시기였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목소리를 높이던 레오였지만, 그 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나이츠의 가장 막내인 자신에게 약한 소리를 털어놓은 것이다.
햇병아리 기사로서는 아주 그냥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발언이었다. 자랑스럽고 긍지 높은 우리 Knights의 왕. 그런 그가 사기가 꺾인 채 풀이 죽어 있다. 츠카사는 우왕자왕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던 츠카사는 이내 레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그런 건 Leader답지 않습니다!'
그리고 후회했다. 자신의 가슴팍에서 꼼지락대는 레오의 온기가 무척 어색했고, 낯부끄러웠다. 당장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들끓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그 마음 한구석에는 더욱 그를 끌어안고 싶다는 마음이 가만히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챘을 때는 츠카사의 얼굴이 자신의 머리색만큼이나 새빨개진 지 오래였다.
'왜 끌어 안는 거야? 오오, 설마 기력 충전? 와하하하, 스오~로는 아직 한참 무리라고?'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레오를 츠카사는 필사적으로 껴안았다.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레오의 머리를 끌어안았을 때, 스튜디오의 문이 열렸다. 어머어머, 입을 가리며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구경하던 아라시와 질렸다는 듯 혀를 차던 이즈미. 언제부터 있었는지 소파에 드러누워 팝콘을 우물거리던 리츠까지. 츠카사는 그 날 밤 이불 속에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당신의 목소리를 좋아해요.
그 한 마디만 했어도 그 정도로 부끄럽진 않았을 거다. 스스로는 나름 성숙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의 츠카사도 아직 한참 어렸다. 처세술 같은 건 겨우 그 나잇대를 웃도는 그 수준이었으리라. 츠카사는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Chess 시절,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Knights였던 과거의 한 때. 무대 위에서 노래하던 레오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에게 말할 수 있을까.
팬 서비스에 불과하지만 관객에게 속삭이는 달콤한 말. 화려한 퍼포먼스와 우아한 몸놀림. 귀를 사로잡는 매력적인 음성. 츠키나가 레오는 타고난 아이돌이었고, 뛰어난 아티스트였다. 즉석에서 자아내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츠카사는 전율했다. 스오우 가의 체면도 잊고 정신없이 그에게 빠져들었다.
조금만 더 솔직했으면 좋았을 걸.
츠카사는 웃었다. 꿈속의 자신이 현실에 되새기는 후회. 하지만 현재의 츠카사는 그저 꿈의 파편으로 사라질 존재가 아니었다. 꿈은 꿈, 현실은 현실. 츠카사에게는 레오를 끌어안을 수 있는 두 팔이 있다. 사랑을 속삭일 입술이 있다. 못다 한 고백을 몇 번이고 되새길 수 있는 자신감도 있었다.
과거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그 모든 것을, 현재의 자신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츠카사는 웃을 수 있다.
"레오, 사랑해요."
오늘은 그에게 노래를 들려달라고 해야지. 츠카사는 거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사랑에 쩔쩔매던 어린 소년은 간 데 없고, 훌쩍 자란 청년이 그 속에서 가만히 웃음을 되돌리고 있을 뿐이다.